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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르타뉴 공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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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브르타뉴 공국은 10세기 초에 형성되어 프랑스 혁명까지 존속했던 역사적 국가이다. 로마 제국 시대 갈리아인과 브리토네스족의 영향, 그리고 브르타뉴인들의 이주를 거쳐 작은 왕국들로 분열되었다가 프랑크 왕국의 지배를 받았다. 9세기에는 브르타뉴 왕국이 성립되었으나, 바이킹의 침입으로 멸망하고 936년 알랭 2세에 의해 브르타뉴 공국이 재건되었다. 14세기 브르타뉴 계승 전쟁을 겪으며 몽포르 가문이 공작위를 차지했고, 잉글랜드와 프랑스의 영향력 다툼 속에서 자치권을 유지했다. 이후 프랑스와의 혼인으로 공국은 프랑스 왕국에 통합되었고, 브르타뉴 삼부회와 고등법원은 자치권 유지를 위해 노력했으나 프랑스 혁명으로 폐지되었다. 현재 브르타뉴 공국은 존재하지 않으며, 브르타뉴 지역은 프랑스의 데파르트망으로 나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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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르타뉴 공국
지도 정보
기본 정보
브르타뉴 공국 국기
상단: 브르타뉴 공작 및 국가 깃발
크로아즈 뒤
하단: 중세 독립 공국에서 사용된 깃발
공식 명칭'
'
일반 명칭브르타뉴
지위독립 공국 (939–942)
서프랑크 왕국의 봉신 국가 (942–987)
프랑스 왕국의 봉신 국가 (987–1491)
프랑스 왕국의 종속국 (1491–1547)
건국일939년 8월 1일
멸망일1547년 8월 13일
건국 사건트랭라포레 전투
멸망 사건프랑스와의 통합
이전 국가브르타뉴 왕국
이전 국가 깃발Flag of Wales without Green.svg
이전 국가 2바이킹 브르타뉴
이전 국가 2 깃발Raven Banner.svg
다음 국가프랑스 왕국 (910-1593)
다음 국가 깃발Pavillon royal de la France.svg
공용어브르타뉴어
갈로어
라틴어
프랑스어
푸아투어
수도낭트, 렌, 및 기타 도시
국가 표어''
''
''
'' (이형)
통화여러가지
정치
정부 형태봉건 군주제
지도자 칭호공작
마지막 지도자클로드
마지막 지도자 통치 기간1514–1524
입법부브르타뉴 삼부회
렌 고등법원
역사
성립아란 바르베토르트가 브르타뉴 공작이 됨
멸망앙리 2세가 프랑스 왕으로 즉위
기타
주요 사건트랭라포레 전투 (939년 8월 1일)
프랑스와의 통합 (1547년 8월 13일)

2. 역사

알랑 바르베토르트가 바이킹의 침입 이후 브르타뉴를 재건하면서 10세기 초에 공국이 성립되었다. 그 이전에는 브르타뉴 왕국이 존재했으며, 로마 제국 시대에는 갈리아인 부족들이 거주하던 아르모리카 반도였다. 4세기에서 7세기 사이에 브리튼 제도에서 브리튼족이 이주해오며 브르타뉴인들이 형성되었다.[1]

프랑크 왕국의 카롤링거 제국은 8세기에 브르타뉴를 정복하였는데, 748년 무렵에 시작하여 799년에 전역을 정복했다. 카롤링거 왕조는 , 낭트, 을 중심으로 지역 통치자들을 이용하여 통일된 행정을 구축하려고 시도했지만, 이 지역에 대한 브르타뉴 왕들의 지배는 불안정했다.

9세기에 노미노에가 독립을 쟁취하며 통일된 브르타뉴 왕국이 부활하였다. 831년 경건왕 루이는 노미노에를 브르타뉴인들의 통치자로 임명하였다. 840년 루이의 사후, 노미노에는 바이킹의 침입에 자극을 받아 대머리왕 샤를에게 도전했다. 에리스포에는 장글랑 전투에서 승리하였고, 851년 앙제 조약으로 브르타뉴의 독립이 보장되었다.

9세기 후반 바이킹의 재침입으로 혼란을 겪었으나, 알랑 1세는 900년경 바이킹을 성공적으로 격퇴시키고 영토를 확장하였다. 907년 알랑 1세 사후, 브르타뉴는 다시 바이킹에게 점령당했다. 알랑 바르베토르트는 936년 바이킹을 몰아내고 브르타뉴 공국을 건국하였다. 939년 8월 1일, 트랑라포레 전투에서 지디카엘 베렝가르와 멘 백작 위그 1세의 도움으로 바이킹을 패배시키고 브르타뉴에서 완전히 몰아냈다.

936년 알란 바르베토르트가 잉글랜드에서 브르타뉴로 돌아와 브르타뉴 공국이 시작되었다.[2] 그는 코르누아이유와 낭트 백작 작위를 주장하며 알랑 2세로서 새로운 "브르타뉴 공작"(Brittonum dux)으로 통치했다. 939년 8월 1일 트랑라포레 전투에서 바이킹을 격파하여 브르타뉴에서 완전히 몰아냈다.[2] 알랑 2세는 프랑스의 루도비쿠스 4세에게 충성을 맹세했다.[2] 이후 브르타뉴 전역에 강력한 지역 영주들이 등장하여 공작에게 느슨한 봉건적 충성을 맹세했다.[2]

알랑 2세는 블루아의 테오발트 1세와 동맹을 맺었으나, 그의 죽음 이후 브르타뉴는 노르만족이나 앙주 세력의 침입에 취약해졌다. 990년 코낭 1세가 공작이 되었고, 공작위는 렌 가문으로 이어졌다. 코낭 1세는 992년 콩크루엘 전투에서 전사했고, 조프루아 1세가 계승했다. 조프루아 1세는 노르망디 공작 리샤르 2세와 결혼 동맹을 맺었다.[2]

11세기노르망디와의 동맹이 깨진 것이 특징이었다. 정복왕 윌리엄은 브르타뉴 공작들에게 싸움을 걸었고, 그들은 프랑스 왕과 동맹을 맺었다. 1008년 조프루아 1세 사후, 리샤르 2세는 어린 알랑 3세를 이용하여 브르타뉴에 간섭했다. 이후 알랑 3세는 노르망디의 윌리엄의 후견인이 되었다. 1040년 알랑 3세는 독살당했고, 코낭 2세가 뒤를 이었다.[2]

코낭 2세는 윌리엄이 후원한 반란 등 친노르망디 세력의 위협에 맞섰다. 1064년~1065년 브르타뉴-노르망디 전쟁은 윌리엄이 돌콩부르 공작 돌의 리발롱 1세의 반란을 지원하면서 발발했다. 코낭 2세는 1066년 앙주 공성전 중 사망했고, 윌리엄이 암살을 계획했을 것이라 여겨진다.[2]

1066년 하부아즈가 여공작이 되었고, 코르누아이유의 오엘과 혼인했다. 오엘은 브르타뉴 공작 오엘 2세로서 통치했고, 케르네브(Kernev) 가문의 통치가 시작되었다. 1075년 오엘은 필리프 1세와 동맹을 맺으며 노르망디에 맞서는 전통적인 정책으로 회귀했다. 1076년 윌리엄은 브르타뉴를 공격했지만, 브르타뉴와 프랑스 연합군에게 패배했다.[2] 평화 협상에서 알랑 4세와 윌리엄의 딸 잉글랜드의 콘스턴스가 혼인했다.[2]

1086년 알랑 4세는 윌리엄의 침략 이후 브르타뉴 공국을 포기해야 했다. 1092년 알랑 4세는 르동 수도원에 영지를 기부했고, 1093년 앙주의 에르멩가르드와 결혼했다. 1098년 제1차 십자군 전쟁에 참여했다.

12세기 중반, 브르타뉴 공국은 잉글랜드프랑스 왕국 사이에서 중요한 지역이 되었다. 두 강대국의 영향력이 공작에게 끊임없이 미쳤다.

15세기 후반, 프랑수아 2세는 프랑스 왕국과의 전쟁에서 패배했다. 그 결과, 그는 자신의 딸 안 드 브르타뉴의 결혼에 프랑스의 동의를 얻어야 했다. 안 드 브르타뉴는 프랑스의 샤를 8세, 루이 12세와 연이어 결혼했고, 브르타뉴는 프랑스 왕국의 영향력 아래 놓이게 되었다.

1532년, 브르타뉴 삼부회는 프랑스 왕국과의 영구적인 연합을 선포했고, 브르타뉴 공국은 프랑스에 통합되었다.[2] 그러나 브르타뉴는 1789년 프랑스 혁명까지 상당한 자치권과 특권을 유지했다.

2. 1. 기원

알랑 바르베토르트가 바이킹의 침입 이후 브르타뉴를 재건하면서 10세기 초에 공국이 성립되었다. 그 이전에는 브르타뉴 왕국이 존재했으며, 로마 제국 시대에는 갈리아인 부족들이 거주하던 아르모리카 반도였다. 4세기에서 7세기 사이에 브리튼 제도에서 브리튼족이 이주해오며 브르타뉴인들이 형성되었다.[1] 이들의 이주에 대한 이유는 밝혀지지 않았다.[2]

프랑크 왕국의 카롤링거 제국은 8세기에 브르타뉴를 정복하였는데, 748년 무렵에 시작하여 799년에 전역을 정복했다. 카롤링거 왕조는 , 낭트, 을 중심으로 지역 통치자들을 이용하여 통일된 행정을 구축하려고 시도했지만, 이 지역에 대한 브르타뉴 왕들의 지배는 불안정했다.

9세기에 노미노에가 독립을 쟁취하며 통일된 브르타뉴 왕국이 부활하였다. 831년 경건왕 루이는 노미노에를 브르타뉴인들의 통치자로 임명하였다. 840년 루이의 사후, 노미노에는 바이킹의 침입에 자극을 받아 대머리왕 샤를에게 도전했다. 에리스포에는 장글랑 전투에서 승리하였고, 851년 앙제 조약으로 브르타뉴의 독립이 보장되었다.

9세기 후반 바이킹의 재침입으로 혼란을 겪었으나, 알랑 1세는 900년경 바이킹을 성공적으로 격퇴시키고 영토를 확장하였다. 907년 알랑 1세 사후, 브르타뉴는 다시 바이킹에게 점령당했다. 알랑 바르베토르트는 936년 바이킹을 몰아내고 브르타뉴 공국을 건국하였다. 939년 8월 1일, 트랑라포레 전투에서 지디카엘 베렝가르와 멘 백작 위그 1세의 도움으로 바이킹을 패배시키고 브르타뉴에서 완전히 몰아냈다.

2. 2. 중세 시대

936년 알란 바르베토르트가 잉글랜드에서 브르타뉴로 돌아와 브르타뉴 공국이 시작되었다.[2] 그는 코르누아이유와 낭트 백작 작위를 주장하며 알랑 2세로서 새로운 "브르타뉴 공작"(Brittonum dux)으로 통치했다. 939년 8월 1일 트랑라포레 전투에서 바이킹을 격파하여 브르타뉴에서 완전히 몰아냈다.[2] 알랑 2세는 프랑스의 루도비쿠스 4세에게 충성을 맹세했다.[2] 새로운 공국은 여러 면에서 카롤링거 왕조 이후 국가들과 유사했다.[2] 이후 브르타뉴 전역에 강력한 지역 영주들이 등장하여 공작에게 느슨한 봉건적 충성을 맹세했다.[2]

알랑 2세는 블루아의 테오발트 1세와 동맹을 맺었으나, 그의 죽음 이후 브르타뉴는 노르만족이나 앙주 세력의 침입에 취약해졌다.[2] 990년 코낭 1세가 공작이 되었고, 공작위는 렌 가문으로 이어졌다. 코낭 1세는 992년 콩크루엘 전투에서 전사했고, 조프루아 1세가 계승했다. 조프루아 1세는 노르망디 공작 리샤르 2세와 결혼 동맹을 맺었다.[2]

11세기노르망디와의 동맹이 깨진 것이 특징이었다. 정복왕 윌리엄은 브르타뉴 공작들에게 싸움을 걸었고, 그들은 프랑스 왕과 동맹을 맺었다. 1008년 조프루아 1세 사후, 리샤르 2세는 어린 알랑 3세를 이용하여 브르타뉴에 간섭했다.[2] 이후 알랑 3세는 노르망디의 윌리엄의 후견인이 되었다.[2] 1040년 알랑 3세는 독살당했고, 코낭 2세가 뒤를 이었다.[2]

코낭 2세는 윌리엄이 후원한 반란 등 친노르망디 세력의 위협에 맞섰다.[2] 1064년~1065년 브르타뉴-노르망디 전쟁은 윌리엄이 돌콩부르 공작 돌의 리발롱 1세의 반란을 지원하면서 발발했다. 코낭 2세는 1066년 앙주 공성전 중 사망했고, 윌리엄이 암살을 계획했을 것이라 여겨진다.[2]

1066년 하부아즈가 여공작이 되었고, 코르누아이유의 오엘과 혼인했다. 오엘은 브르타뉴 공작 오엘 2세로서 통치했고, 케르네브(Kernev) 가문의 통치가 시작되었다. 1075년 오엘은 필리프 1세와 동맹을 맺으며 노르망디에 맞서는 전통적인 정책으로 회귀했다. 1076년 윌리엄은 브르타뉴를 공격했지만, 브르타뉴와 프랑스 연합군에게 패배했다.[2] 평화 협상에서 알랑 4세와 윌리엄의 딸 잉글랜드의 콘스턴스가 혼인했다.[2]

1086년 알랑 4세는 윌리엄의 침략 이후 브르타뉴 공국을 포기해야 했다. 1092년 알랑 4세는 르동 수도원에 영지를 기부했고, 1093년 앙주의 에르멩가르드와 결혼했다. 1098년 제1차 십자군 전쟁에 참여했다.

12세기 중반, 브르타뉴 공국은 잉글랜드프랑스 왕국 사이에서 중요한 지역이 되었다. 두 강대국의 영향력이 공작에게 끊임없이 미쳤다.

2. 2. 1. 브르타뉴 계승 전쟁 (14세기)

1341년 장 3세 사후, 몽포르 가문과 블루아 가문 간의 공작위 계승 분쟁으로 내전이 발발했다. 이는 백년 전쟁의 일환으로, 잉글랜드는 몽포르 가문을, 프랑스는 블루아 가문을 지원하며 확전되었다. 1364년 오레 전투에서 몽포르 가문이 승리, 장 4세가 공작이 되었다.[2]

게랑드 조약에 따라, 몽포르 가문에 적법한 남성 후계자가 없을 시 잔의 연장자 남성 후손이 브르타뉴를 계승하는, 절반의 살리카법이 합의되었다. 몽포르 가문은 잉글랜드의 지원을 받아 브르타뉴 내 잉글랜드의 입지를 강화했다.[2]

2. 3. 프랑스 왕국과의 관계

15세기 후반, 프랑수아 2세는 프랑스 왕국과의 전쟁에서 패배했다. 그 결과, 그는 자신의 딸 안 드 브르타뉴의 결혼에 프랑스의 동의를 얻어야 했다. 안 드 브르타뉴는 프랑스의 샤를 8세, 루이 12세와 연이어 결혼했고, 브르타뉴는 프랑스 왕국의 영향력 아래 놓이게 되었다.

1532년, 브르타뉴 삼부회는 프랑스 왕국과의 영구적인 연합을 선포했고, 브르타뉴 공국은 프랑스에 통합되었다.[2] 그러나 브르타뉴는 1789년 프랑스 혁명까지 상당한 자치권과 특권을 유지했다.

2. 4. 프랑스 혁명 이전

1532년 프랑스에 통합된 이후에도 브르타뉴는 브르타뉴 고등법원과 삼부회를 통해 제한적인 자치권을 유지하였다. 브르타뉴의 귀족들은 세금 감면, 브르타뉴 의회 참석권 등의 특권을 누렸다. 1789년 프랑스 혁명으로 브르타뉴의 자치권과 특권은 폐지되었고, 브르타뉴는 프랑스의 여러 데파르망(주)으로 분할되었다.

3. 사회, 문화, 통치

아르튀르 2세는 프랑스 국왕에게서 자유롭게 통치했으며, 그의 통치 시기에 강력한 방어시설 목적의 구역 설정, 브르타뉴 삼부회 개설 등 행정적 혁신을 이뤄냈다.[2] 아르튀르 2세의 집권 시기는 리모주의 마리와 첫 번째 혼인, 스코클랜드 왕비 드뢰의 욜랑드와 두 번째 혼인 등 두 차례의 혼인으로 유명하다.

장 3세는 공작이 되었지만, 세 차례나 혼인했음에도 후계자를 두지 못했다. 장 3세의 상속 노력은 그의 배다른 형제 몽포르의 장을 배제하는 데 집중되었다. 그는 브르타뉴를 독립적인 주권 국가로 유지하려는 모든 전례를 무시하고 프랑스 왕을 후계자로 임명하려 했다. 브르타뉴 귀족들은 이 시도를 거부했고 브르타뉴의 독립은 계속되었다. 장 3세는 1341년에 후계자 없이 사망했다.

몽포르의 장은 공작위를 요구했지만, 펭티에브르의 잔과 남편 블루아의 샤를의 주장을 프랑스 왕이 선호하면서 거부되었다. 브르타뉴 계승 전쟁은 몽포르의 장이 권리 포기를 거부하면서 발발했다. 이 전쟁은 1341년부터 1364년까지 블루아샤티용가와 몽포르가 간의 분쟁이었다.

1364년 오레이 전투. 몽포르 가문이 브르타뉴 계승 전쟁에서 승리했다.


블루아샤티용의 샤를은 1341년부터 죽을 때까지 브르타뉴 공작을 칭했다.

전쟁 중 몽포르의 장은 파리에 수감되었다가 1341년 마레트루아 조약으로 풀려났다. 그는 1345년에 사망했고, 공작에 대한 몽포르가의 권리는 아들 장에게 남겨졌다. 장의 미망인 플랑드르의 잔은 섭정으로 활동하며 전쟁을 지속했다. 몽포르가는 잉글랜드 동맹군의 도움으로 승리했다. 항복 조건으로 잔은 펭티에브르를 유지하고 브르타뉴 여공작 작위를 유지했다. 게랑드 조약에서는 몽포르가 출신 지배자가 남자 후손을 두지 못할 경우 잔의 직계 남자 후손이 공작 자리를 상속받는 절반 정도의 살리카 계승법이 합의되었다. 장 4세는 내전 이후 어려운 통치를 하다가 1373년에 잉글랜드로 망명했다.

몽포르가의 승리는 브르타뉴에서 잉글랜드의 위치를 강화했다. 브르타뉴 계승 전쟁의 결과 중 하나는 브르타뉴를 둘러싼 프랑스와 잉글랜드 간의 적대 관계 확인이었다. 펭티에브르 가문과 몽포르 가문은 샤를 5세에 맞서는 데는 협력했다. 프랑스 왕은 브르타뉴를 프랑스 왕령지로 합병하려 프랑스 대무관장 베르트랑 드 게클랭을 파견했다. 브르타뉴 귀족들이 잉글랜드 군대의 도움을 받아 반란을 일으키자, 장 4세는 잉글랜드에서 돌아와 집권했다. 폐위된 펭티에브르의 잔은 샤를 5세에 맞서 공국을 지키기 위해 장 4세를 브르타뉴로 귀환시키는 노력에 동참했다. 장 4세는 세 번 결혼했지만, 세 번째 아내 나바라의 잔만이 아이를 낳았다. 장 4세는 1399년 11월 1일에 사망했다. 잔은 아들 장 5세의 섭정으로 4년간 미망인으로 있었다. 장 5세가 아버지의 자리를 이어받을 때까지 몽포르 가문은 공작위를 유지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3. 1. 경제

브르타뉴 북쪽과 서쪽은 목축업 경제에 의존했고, 남동쪽은 따뜻한 날씨 덕분에 소규모 농장을 기반으로 한 다양한 작물 재배와 목축업을 했다.[1] 브르타뉴 지역은 어업과 무역업을 포함해 활발하고 다양한 해양 경제를 누렸다. 브르타뉴 공국 시기에는 많은 화폐들이 존재했으며, 브르타뉴 공작들이 때로는 직접 동전을 주조하기도 했다. 금과 은이 무역에 사용되기도 했다.

3. 2. 민간 전승과 신화

12세기에 코낭 메리아도크 전설이 북서유럽에서 유행했다.

연대기 작가 요르다네스는 리오타무스라는 켈트족의 “위대한 지도자”가 470년경에 로마 황제를 대신하여 브르타뉴 지방에서 싸웠다는 기록을 남겼으나, 이 시기의 다른 증거는 부족하다.[2]

3. 3. 로마 가톨릭 교회의 역할

그레고리오 개혁의 영향으로 브르타뉴 공국 내 대형 수도회들이 성장하였다. 브르타뉴 귀족들의 지원으로 새로운 교회와 수도원들이 건설되었고, 교회 행정은 더욱 활발해졌다. 13세기에 이르러 새로운 탁발 수도회가 공국 전역으로 퍼져나갔으며, 이들은 도시 중심지를 지배하던 영주들의 지원을 받았다. 탁발 수도회는 대중적인 인기를 얻었으며, 15세기에 더욱 번성하였다. 지역 성인들의 유해가 여전히 인기를 유지하는 한편, 성모 마리아와 사도 요한과 같은 가톨릭 성인들과 관련된 유물들이 13세기와 14세기에 걸쳐 점점 더 인기를 얻었다.

3. 4. 관습과 법

브르타뉴 공국은 봉건 사회였으며, 법과 관습은 수많은 지역 성 소유주에서 소수의 백작과 도시 중심지의 공작에 이르기까지 브르타뉴 영주들의 계층 구조를 통해 운영되었다.[1] 이처럼 수많은 지역 영주들에게 의존한 것은 이 지역의 이전 켈트족과 카롤링거 왕조의 정치 체제와의 단절을 의미했다.[2] 역사가 갈리우와 존스가 묘사했듯이 브르타뉴의 귀족들은 전망이 "보수적이고 고집이 셌지만", 프랑스 사회와 문화의 영향을 크게 받았으며, 이는 때때로 더 오래되고 지역적인 전통과 관습과의 긴장을 초래했다.

10세기와 11세기에 형성된 브르타뉴 공국은 프랑스의 영향을 받으면서도, 브르타뉴 삼부회와 브르타뉴 고등법원을 통해 제한적인 자치권을 행사했다.

3. 5. 의회 정치

아르튀르 2세는 프랑스 왕국으로부터 완전히 독립적인 것으로 여겨졌던 브르타뉴 삼부회를 설립하였다. 그는 1309년에 최초의 브르타뉴 삼부회를 소집했는데, 이는 의회 기구를 만든 것 외에도 제3신분을 포함시키는 혁신을 더했다.[2]

이러한 의회 기구들은 브르타뉴 계승 전쟁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몽포르 가문에 유리하게 팡티에브르 가문의 공작 작위 주장을 해결하는 데 기여했다. 브르타뉴 삼부회는 몽포르 가문의 프랑수아 2세 통치 기간 동안 게랑드 조약의 조항을 무효화하고 안이 프랑수아 2세의 유일하고 합법적인 공작 계승자임을 확인하는 데 활동했다. 안 여공작을 지지하는 이러한 조치는 팡티에브르 가문의 공작 작위 주장을 효과적으로 종식시켰다.[2]

르네 고등법원은 1485년 프랑수아 2세에 의해 설립되었고, 처음에는 반에서 회합을 가졌다. 나중에 고등법원은 으로 이전되었고, 고등법원 건물은 오늘날까지도 법원으로 사용되고 있다. 처음에 르네 고등법원은 주권 법원으로 기능했으며, 무엇보다도 브르타뉴 귀족들의 고대 권리를 보호하기 위해 고안되었다. 그 구성원 중 많은 수가 브르타뉴 삼부회의 구성원이기도 했다.[2]

브르타뉴 공국이 프랑스 왕관에 병합된 후, 르네 고등법원은 프랑스 왕국과는 별개로 공국의 권리를 관리하고 보존하는 더 큰 책임을 맡게 되었다. 프랑스의 앙리 2세는 브르타뉴 공작으로서 모든 권리를 가지고 있었지만, 공국에 자주 있는 것도 아니었고, 그 의회의 독립적인 활동을 보존하려는 의향도 전혀 없었다. 프랑스 국왕들이 루이 14세, 루이 15세, 루이 16세 치하에서 더 큰 중앙 집권화된 권력으로 나아감에 따라, 왕국과 공국 간의 긴장이 고조되었다. 1771년 9월, 르네 고등법원은 프랑스의 루이 16세의 명령에 따라 폐쇄되었고, 그 후 국민의회는 1790년에 고등법원을 폐쇄하는 프랑스 법을 발표했다. 르네 고등법원은 회합을 열고, 고등법원이 설립된 브르타뉴의 법률과 전통에 근거하여 이러한 조치는 법적 효력이 없다고 선언했다. 이러한 주장에도 불구하고, 르네 고등법원은 1790년 이후로 회합을 열지 않았다.[2]

4. 유산

오늘날 브르타뉴 공국은 존재하지 않으며, 브르타뉴 공작위와 브르타뉴 공작의 역할, 그리고 렌의 브르타뉴 고등법원 모두 프랑스 제5공화국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루이 16세가 고등법원을 해산했지만, 고등법원은 입법 및 사법 기관을 해산할 권한은 자신들에게만 있다고 주장하며 왕의 명령을 거부했다.[1] 1956년 이후 옛 브르타뉴 공국의 80%만을 포함하는 브르타뉴 레지옹이 존재하지만, 나머지 20%는 브르타뉴 공국의 옛 수도인 낭트를 주도로 하는 페이드라루아르의 루아르아틀랑티크 데파르망에 속한다.[1]

''여공작 안의 감옥'' 14세기에 지어진 디낭성

참조

[1] 문서 potius, mori, quam, foedari의 라틴어 해석
[2] 웹사이트 Brittany Genealogy http://fmg.ac/Projec[...] 2008-0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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